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워드로스 2세 (문단 편집) === 복수 끝에 제위를 쟁취하다 === 결혼 관계 때문에 한동안 화를 참고 있던 카사는 결국 폭발해 1846년, 메넨 리벤 황후와 라스 알리를 기습했다. 그해 가을에 제국 중부에 있는 도시 뎀베아를 약탈했고, 1847년 초에 수도 곤다르를 기습해 점령했다. 카사는 멋대로 곤다르 시장을 임명해 앉히고 궁정 곡물 창고를 약탈했다. 그해 말에 카사가 곤다르에서 물러나자 메넨 리벤 황후는 후퇴하는 카사 군대의 뒤를 치면서 타나 호수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는 최악의 판단으로 제국 중앙군이 참패했고 요하네스 3세와 메넨 리벤 황후 부부가 카사에게 사로잡히는 참사까지 벌어졌다. 라스 알리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치욕을 참으며 데자즈마흐 작위를 얹어주고 뎀비야 땅의 통치권을 카사에게 반환했다. 이에 카사는 황제 부부를 석방하고 크와라로 돌아갔다. 이후 카사는 자신의 권위를 세울 겸 이집트에 무력도발을 감행하여 수단으로 진군했으나, 다바르키 요새 전투에서 훨씬 수가 적지만 서구화된 이집트군에게 대패하였다. 이 경험에서 서구 무기와 전술의 무시무시함을 체감한 카사는 서둘러 서구 총기와 대포를 구해 자신의 군대에 조금씩 보급하였다. 1848년, 라스 알리는 카사를 예주 공작령의 중심지인 데브레타보르로 소환했다. 하지만 카사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라스 알리는 카사를 끌고 오기 위해 군대를 보냈으나, 카사는 군대가 오는 족족 이를 격파했다. 카사가 일곱 번째로 라스 알리의 군대를 격파하자, 1852년에 라스 알리는 크와라 정벌 및 카사 체포를 선언하였다. 이에 맞서 카사 역시 라스 알리 격파와 허수아비 황제인 [[요하네스 3세]] 및 [[사흘레 덴겔]][* 방계 황족으로, 라스 알리의 신하에 가까운 사람이라 메넨 리벤 황후와 라스 알리가 요하네스 3세와 의견 차이가 생길 때마다 황제를 맡았다.] 폐위를 천명하면서 먼저 진군하기 시작했다. 진군의 목표는 제국의 수도 [[곤다르]]였다. 이 전쟁은 카사의 제위를 향한 투쟁임과 동시에 그의 초년기에 만났던 수많은 원수들에 대한 복수이기도 했다. 카사를 처음으로 가로막은 이는 이전에 뎀비야를 놓고 싸워서 카사를 패배시키고 그가 복종했음에도 굴욕을 준 상대, 다못 공작 겸 고잠 공작 데자즈마흐 고슈 저우디였다. 라스 알리가 카사의 땅을 고슈 저우디에게 준다고 선언했기에 군대를 끌고 와 선봉을 맡았다. 고슈 저우디의 군대는 강대했기 때문에 라스 알리 측은 자신만만했다. 이 소식을 들은 카사는 우선 산 위에 올라가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그러자 고슈 저우디는 이를 회피해 뎀비야 땅 깊숙히 들어갔다. 두 군대는 한참동안 유리한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기동전을 펼쳤는데, 그러다 카사의 군대가 평지로 나오자 고슈 저우디가 즉각 공격 명령을 내리면서 구르 암바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카사는 손쉽게 고슈 저우디의 군대를 대파하면서 첫 복수를 성공했다. 고슈 저우디는 카사의 손에 전사했고 상당수의 군사는 전장에서 전사했으며, 일부 패잔병은 가진 것을 모조리 털린 채 고잠으로 돌려보내졌다. 고슈 저우디를 격파한 카사는 일단 숨을 고르자는 판단 하에, 라스 알리에게 승전보를 알리는 한편 화친을 제안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카사의 승리 소식을 듣고 공포에 질려버린 라스 알리는 카사를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을 것이라 판단, 황제와 조정을 이끌고 데브레타보르로 도망쳤다. 덕분에 카사는 곤다르에 무혈입성하였다. 데보르타보르에서 라스 알리는 예주, 월로, 티그레이 세 지방의 모든 군대를 소집했다. 예주와 월로는 [[오로모인]] 지역이고 티그레이는 [[티그라이인]]지역으로, 두 민족은 에티오피아 내에서도 잘 싸우기로 유명한 민족들이었다. 또 라스 알리는 데자즈마흐 우베 하일레마리암과도 동맹을 맺었다. 카사를 공공연히 모욕하고 천대한 라스 알리와 카사가 어릴 때 학교를 불태우고 카사의 친구들을 무참히 살해한 우베 하일레마리암이 손을 잡은 것이다. 사실 10여년 전 1842년에, 우베 하일레마리암이 제위를 노리고 곤다르를 침공해서 라스 알리가 크게 패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 역시 사이가 무척 좋지 않았지만, 그들과 악연이 깊은 카사가 무서우리만큼 강해지자 임시 동맹을 맺게 된 것이다. 1853년 봄, 라스 알리의 군대가 진군하였다. 라스 알리 군대를 이끄는 사령관은 월로 공작 데자즈마흐 비루 알리가즈로, 이전에 우베 하일레마리암이 라스 알리를 이겼을 때 우베 하일레마리암을 쳐서 내쫓고 라스 알리가 권력을 찾게 도와준 인물이었다. 그를 따라 무려 네 명의 데자즈마흐가 종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카사는 곤다르에서 도보 3시간 거리에 있는 골고라 비셴이라는 곳에 진지를 만들고 적을 맞을 준비를 했다. 진군 한달 후 두 군대는 골고라 비셴 인근의 타쿠사에서 맞닥뜨렸고, 타쿠사 전투가 벌어졌다. 카사는 수 배나 많은 적군을 상대로, 오히려 데자즈마흐 다섯 중 둘을 전사시키는 괴력을 발휘하며 또 다시 대승을 거두었다. 타쿠사 전투에서 승리한 카사는 다시 진군을 시작했다. 이번 목표는 라스 알리 가문의 본거지 데브레타보르였다. 공포에 질린 라스 알리는 고잠으로 도망쳤고, 카사는 손쉽게 데브레타보르를 점령한 후 대대적으로 약탈했다. 그리고 라스 알리를 잡기 위해 고잠으로 진격했다. 라스 알리는 두 번의 전투에서 많은 군사를 잃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카사에 비하면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고잠은 당시 에티오피아의 최남부로, 더 도망칠 곳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고잠의 아이샬이라는 곳에서, 라스 알리는 친히 카사를 맞아 싸웠다. 더 물러날 곳이 없는 라스 알리와 군사가 많지는 않아 한번의 패배가 치명적인 카사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운 아이샬 전투에서, 라스 알리는 무참히 패배했다. 이 전투를 기점으로 라스 알리는 강대했던 세력을 모두 잃고 몸만 간신히 빠져나와 자신의 영지 예주로 도망쳤고, 요하네스 3세와 메넨 리벤 황후는 다시 한번 붙잡혔다. 아이샬 전투 이후 카사는 황제 내외를 데리고 곤다르로 돌아갔다. 그리고 요하네스 3세 폐위를 발표했다. 다만, 카사는 예전에 메넨 리벤 황후와 라스 알리 가문이 자신을 괴롭힐 때 요하네스 3세만은 자신을 좋게 보고 대접해 준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메넨 리벤 황후와 이혼하는 것을 조건으로 귀족 작위를 유지하고 카사의 가신으로 살게 해주었다. 메넨 리벤 황후는 투옥되어 10여 년을 갇혀있다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 한편, 패배하여 도망친 라스 알리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패배의 고통으로 인해 병까지 앓다가 1856년 병사한다. 1853년 하반기에는 곤다르에서 자신의 패권을 확립하는 데에 주력하면서 휴식한 후, 1854년 봄에 다시 원정을 나갔다. 이번 목표는 일전에 아이샬 전투가 있었던 고잠으로, 이전의 구르 암바 전투에서 카사가 죽였던 데자즈마흐 고슈 저우디의 아들 비루 고슈를 토벌하기 위함이었다. 비루 고슈가 아버지의 복수를 천명하면서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1854년 3월에 카사가 고잠 지역에 도착했다. 그러자 비루 고슈는 아내에게 중심지인 암바 제벨리 성의 수비를 맡기고 자신은 성을 나와 성문 앞에 진을 쳤다. 비루 고슈는 이전에 아버지가 라스 알리와 소규모 전투를 벌일 때 보고 배운 전술을 시도했으나, 에티오피아 제일의 전쟁 전문가인 카사에게 얕은 수는 먹히지 않아 참패하고 포로로 잡혔다. 비루 고슈는 투옥되어 1868년에 감옥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아내는 남편과 이혼하고 성을 바치는 조건으로 살아남았다. 네 번의 큰 전투와 셀 수 없는 작은 전투 끝에 카사는 마침내 에티오피아의 [[패자]]가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북쪽 세미엔의 우베 하일레마리암, 그의 가장 큰 원수였다. 이 시점에서 카사와 우베 하일레마리암은 긴장 속의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이샬 전투의 결과를 본 우베가 식겁하여 선물을 주면서 화친을 청했고, 남쪽 고잠에서 싸우고 있던 카사가 양면전선을 막기 위해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사는 본래 우베의 세력권인 티그레이에서 군대를 철수시켰지만, 우베가 데리고 있던 에티오피아 총대주교 아부네 살라마는 곤다르로 불러들였다. 아부네 살라마는 우베가 에티오피아의 지배자를 사칭하여 [[콥트 교황]]에게 총대주교 임명을 부탁하여 내려온 주교로, 본래 우베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마침 이때 에티오피아에는 삼생론이라는 이단이 발생하여 창궐하고 있었는데, 카사가 아부네 살라마를 도와서 이단을 박멸하고 그의 권위를 살려주면서 감동한 아부네 살라마는 충성을 카사에게 바치게 되었다. 우베의 권위의 중요한 축이던 아부네 살라마를 빼앗긴데다가 원래 카사와 악연이 깊던 우베는 분노하여 1855년 초에 휴전 파기를 선언했다. 이에 카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북진하여 1855년 2월 9일에 티그레이의 중심지인 다라지에서 우베의 군대와 대전투를 벌였다. 이것이 다라지 전투이다. 우베는 전력으로 맞서싸웠으나 채 하루를 못 버티고 대패하였고, 이 전투에서 사로잡혔다. 카사는 그를 투옥시켰다. 우베는 1867년에 감옥에서 사망한다. 이로써 길었던 에티오피아 판관의 시대는 끝이 났고, 제국은 통일되었다. 카사는 그를 괴롭혔던 이들을 모조리 쳐부수고 죽이거나 감옥에 집어넣었다. 다라지 전투 이틀 후, 카사는 황제에 즉위했다. 그의 즉위명은 테워드로스로, 당시 에티오피아에서 옛 황제인 테워드로스 1세의 영웅 전설이 유행 중이어서 테워드로스 1세의 좋은 이미지에 편승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으로 테워드로스 2세 치세가 시작되었다. 우베에게 굴욕을 주고자, 대관식을 일부러 우베의 거점이던 다라지의 마리암 성당에서 열고 우베를 묶어 대관식에 전시하듯 놓아 두었다. 대관식에서, 테워드로스 2세는 조국의 재건과 서구화를 이루어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